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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우리땅 시간여행

창경궁 나무이야기



순종 1건

순종 3권 2년 11월 1일 (양력) 2번째기사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립하고 사람들에게 관람하도록 허락하다'


순종부록 1건

순부 2권 4년 4월 26일 (양력) 1번째기사 

'박물관과 동식물원을 창경원으로 통칭하다'


창경궁의 역사는 우리 궁궐중에서도 가장 파괴가 심했던 약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위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제는 철저하게 궁의 역사를 없애고, 명칭 또한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창경궁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기까지 70여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음을 생각하면, 아직 우리가 복원해야 할 역사는 멀기만 하다. 






-동궐도-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 있던 곳이다.

성종 14년(1483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 편전인 문정전, 침전인 수령전, 그리고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사성각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는데,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되었다.


-한국어위키백과사전-



조선후기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과 궁궐 전경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궁궐 그림인 동궐도를 살펴보면, 

현재 우리 궁궐의 원형이 얼마나 파괴되었고 없어졌는지, 그림으로나마 실감할 수 있다.

역사복원의 출발점이 된 '창경궁의 나무'를 통하여 이 땅의 역사의 흥망성쇠를 반추해본다. 





회화나무


문정전앞에서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곧장 창경궁 동편 담장의 선인문으로 옮겨진다. 

안타깝게도 뒤주는 회화나무 아래에서 어둠보다 더 처절한 비명을 지른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한(恨)을 목격한 회화나무는 그 고통에 똑바로 크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비틀며 그 슬픔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창경궁 궐내각사터에는 아직도 그 회화나무가 옆으로 울고 있다.











회화나무는 느티나무와 같이 한자로는 괴목으로 불렸다.

창경궁의 회화나무는 궁궐을 그린 그림 동궐도에도 나온다.

예전부터 회화나무는 집에 심으면 가문에 큰 인물이 나온다고 하여, 길상목으로 불렸다. 그로 인해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회화나무는 주로 궁궐이나 사찰, 서원에 많이 심었다. 








버드나무와 관천대


조선왕조실록 성종 171권, 15년(1484 갑진 / 명 성화(成化) 20년) 10월 16일(경오) 2번째기사


창경궁이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버드나무를 심게 하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양전(兩殿)15432) 이 창경궁(昌慶宮)으로 옮기면 담 밖에 통하여 바라보이는 곳이 있을까 하여 해당 관사(官司)로 하여금 속히 자라는 잡목(雜木)을 널리 심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해사에서 과목을 심도록 청하니,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지금 내가 애매(曖昧)한 말을 듣고 있다. 내 생각은 버드나무같이 쉽게 자라는 나무를 섞어 심어서 바라보이는 곳을 가리어 막고자 하는데, 이제 공조(工曹)에서 과목을 심기를 청하니, 이는 나의 본의가 아니다. 외간에서 들으면 반드시 나를 원지(園池)15433) 에 나무를 심어서 관상(觀賞)을 좋아한다고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되면 애매함이 없겠는가? 장원서 노예(掌苑署奴隸)로 하여금 버드나무를 빨리 심게 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창경궁의 나무에 관한 몇 안되는 기록인데, 원칙적으로 궁궐안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래도 궁궐안의 나무는 임금의 안전에 많은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칙에 반하여 성종은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는데, 이는 궁궐안의 사생활보호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황철나무 


창경궁 관천대 앞에서 종묘 후문에 이르는 길에 하얀 철갑을 두른 듯한 황철나무가 있다.

주로 추운지방에 사는 황철나무는 족보상 버드나무와 사시나무의 친척관계이다.

황철나무는 키가 30m, 지름이 1m, 나무껍질은 회색이지만 갈라지면서 흑갈색으로 변한다.











창경궁 궐내각사터














옥천교와 살구나무


창경궁 옥천교 아래에는 살구와 앵두가 익어가고 있다. 













숭문당 뒷뜰의 향나무


창경궁 숭문당 뒷뜰의 향나무는 솟아오르는 기개가 대단하다.














향나무 


비틀어졌기에 더 단단하고 옹골지다.

부정을 씻어주는 나무인 향나무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가장 오래 사는 나무 중 하나이다.

오래된 나무는 천 년을 넘게 살기도 한다. 













숭문당 뒷뜰의 주목


숭문당 뒷뜰에는 주목이 살고 있다. 말 그대로 붉은 나무이다.

안타깝게도 나이와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정전이 명정전을 향해 고개를 숙인 모습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주목


오래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속을 비워내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환경전 뒷편의 멋진 우리나무













명정전 행각의 기둥


행각은 문의 좌우로 연결되는 (1)회랑을 말한다. 

생명의 숨결은 다했지만, 역사의 숨결은 다시 살아난다.



(1)회랑: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의 성격을 지닌 건축물












궐내각사터에서 문정전 가는 길 


창경궁에는 큰 나무가 살고 있다.

역사의 숨결이 나무에도 궁궐에도 아직 숨쉬고 있다.













궁궐지킴이 회화나무


문정전을 나와 아래로 걸어오면 창경궁 전각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회화나무는 가지의 뻗음이 제멋대로여서 이를 두고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고 하여 '학자수'라고 부른다.

영어이름도 Scholar Tree(학자나무)이다.











창경궁 궐내각사터의 여름 














창경궁의 소나무


소나무는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태어나서 금줄에 소나무의 가지를 달고, 죽을 때 관으로 사용되는 것이 소나무이다.

소나무는 또한 늘 푸르기 때문에 대나무, 매화와 더불어 절개의 상징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임금들은 소나무에게 정이품송, 종이품송, 대부송등의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소나무를 단순히 나무로 대하기 보다는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 것이다. 










아프고 상처받은 역사는 아직도 완전히 치유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나온 길을 기억하고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일은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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