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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융릉

어가가 1)현륭원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향(香)을 피우려 할 적에 2)상이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

겨우 의식을 마치고 이어 원(園)에 가서 3)봉심하였는데,

상이 더욱 오열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자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울면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영의정 홍낙성과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나와 아뢰기를,
“지금이 바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때입니다. 신들이 등으로 업어야겠습니다.”하고는, 그대로 4)보여(步輿)를 내오자

 

상이 이를 물리치고 곁에 모신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원에서 내려와서야 비로소 보여를 타고 재전(齋殿)으로 돌아왔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39, 18(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 113(신축) 2번째기사-

 

 

1)현재의 융릉

2)정조

3)임금의 명을 받들어 능이나 종묘를 보살피는 일

4)지위가 높은 사람이 타던 수레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장헌세자로 추존)가 묻힌 현륭원을 수시로 찾으면서 눈물을 자주 흘린 이야기는

위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비극적 운명을 달리한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조에게는 늘 마음 한켠을 먹먹하게

하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융릉(隆陵)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莊祖, 1735년~1762년)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1735년~1815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1)배봉산기슭에 2)수은묘로 있었으나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조13년인 1789년에 아버지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 현재 위치로 천장하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년 12월 15일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년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년 11월 12일, 장헌세자를 왕으로 3)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 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융릉은 건릉과 함께 사적 20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위치하고 있다.

 

 

 

1)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2)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함

3) 추존왕이란 살아 있을 때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죽은 뒤에 왕의 칭호를 받는 것

 

*조선시대 추존왕: 덕종,원종,진종,장조,익종

 

 

 

 

 

 

 

 

조선왕릉에 공간적 배치는 위의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왕릉은 크게 영혼의 공간인 능침공간과 인간의 제례공간으로 구분된다.

 

금교에서부터 천천히 융릉을 둘러보았다.

 

 

 

 

 

 

 

 

 

 

융릉을 들어서는 첫 관문은 금천교라는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금천교를 건넌다는 것은 물을 건너면서 부정한 것을 씻어낸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보통 금천교는 네 귀퉁이에 판석이 밀려나지 않도록 돌기둥을 박아 놓아 약간 위로 나와 있는 형태가 대부분이나,

융릉의 금천교인 원대황교는 다리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금천교의 유래는 1795년 정조의 을묘원행에 맞춰 화성군 태안면 황계리에 세운 다리이나,

이 곳에 성남비행장이 들어서면서 1970년에 다시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세울 당시에는 대황교였었는데 다리의 일부를 옮길 때 원대황교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금천교(융릉교)를 건너면 홍살문과 함께 수라간, 정자각이 보인다.

왕릉입구에서부터 활엽수와 침엽수로 적절하게 조성된 융릉은 정조가 각별히 조경에도 신경썼음을 엿 볼 수 있다.

 

 

 

 

 

 

 

 

 

 

 

왕릉의 공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홍살문이다.

 

홍살문은 왕릉의 출입문이다.

홍살문 안으로는 왕릉의 영역임을 나타내는 표지로 기둥 2개를 세우고 지붕없이 살만 박혀있다.

나무기둥에는 붉은 칠을 하여 사악한 기운을 쫓으며, 위의 가로 기둥에 세운 홍살의 수는 홍살문마다 다르며

음양오행설에 따라 보통 9개 11개 13개등으로 홀수로써 음양의 '양'을 나타낸다.

중앙에 홍살 2개가 태극을 지나가면서 3개가 되지만, 이것은 하나로 친다.  따라서 융릉의 홍살문의 홍살갯수는 11개가 된다.

 

 

융릉은 다른 조선왕릉과 다른 특이한 공간배치를 갖고 있는데, 이는 중앙에 위치한 정자각이 능침을 가리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조선왕릉은 신성한 공간인 능침이 참배자나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능침과 정자각, 홍살문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다.

즉 정자각이 능침의 가리개가 된다. 그러나 융릉은 정자각이 능침의 앞을 막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 있다.

 

 

 

 

 

 

 

 

어도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판위(배위)는 왕이 제례시에 홍살문 앞에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가는 곳이다.

 

 

 

 

 

 

 

 

 

 

 

참도는 왕릉의 입구인 홍살문부터 제례를 지내는 정자각까지의 길이다.

납작한 돌인 박석이 깔려 있으며, 왼쪽에 더 높은 곳이 신도(영혼이 다니는 길), 오른쪽에 낮은 곳이 어도(임금이 다니는 길)로 나뉘어져 있다.

신도는 신로, 어도는 어로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융릉의 참도는 특이하게 참도 옆에 박석을 더 깔아  전체적인 왕릉의 전경을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참도를 따라 걷다보면 제례를 치르는 공간인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은 제례를 올릴 때 제례음식을 차리고 모든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왕릉의 중심건물인 정자각은 형태가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어서 정자각이라고 부르며,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정자각은 정전과 배전으로 구분 할 수 있는데, 정전은 제례를 지내기 위해 닫힌 공간이며, 배전은 제례를 보조하기 위해 열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전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 배전은 전면 1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을 배전보다 한 단계 위에 배치하여 높은 위계를 상징한다.

정자각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용두와 잡상을 배치하고 있다.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도 신계와 어계로 구분한다.

신도에서 연결되어 왼쪽으로 오르는 계단을 신계, 어도와 연결되서 왕과 제관이 오르는 계단을 어계(동계)라고 한다.

신계의 소맷돌(난간과 비슷한 개념)에는 구름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소맷돌 맨 아래 고석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어계에는 소맷돌이 없다.

 

 

 

 

 

 

 

 

 

 

 

정자각 왼쪽(서쪽)으로는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밖에 없는데, 이는 제례가 끝나면 임금과 제관들이 내려가는 계단으로 서계라고 한다.

계단이 하나 밖에 없는 이유는 신은 능침으로 바로 향하기 때문에 나가는 길인 계단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제례를 올릴 때는 왕과 제례를 담당하는 이들이 정자각의 오른쪽 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예를 올리고 서쪽(왼쪽)에 있는

출입문을 통하여 나온다. 중앙의 문은 홍살문에서 왕을 접한 선왕의 혼령이 왕과 함께 참도의 왼쪽길로 정자각까지 와서

동계 옆에 설치된 정계와 정자각의 중앙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제례가 끝나면 정자각 뒤쪽 문을 통해 혼령이 능상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건물의 공간배치는 앞쪽에는 3개의 문이 필요하다.

 

 

왕과 제례를 담당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좌우측 문과 혼령이 사용하는 가운데 문이 필요하기 때문에 3개의 문이 만들어진 것이며,

뒤쪽에는 혼령만이 사용하므로 문을 1개만 만든 것이다.

 

 

정전 내부에는 혼령이 앉는 신어평상(神御平床) 1좌와 제상 2좌, 향상 1좌, 촉대사 1좌, 축상 1좌, 기타 각종 돗자리(화문석)와

주렴(珠簾) 등이 설치되는데 제향 시 사용되는 음식 등은 제상 위에 진설된다.

 

 

 

 

 

융릉의 정자각과 능침

 

 

 

 

 

 

 

 

 

 

 

비각은 정자각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일대기를 적은 비가 안치된 곳이다.

융릉의 비각에는 2개의 비석이 있는데 정조와 고종의 친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정조가 쓴 ‘조선국 사도 장헌세자 현륭원’이고,

다른 하나는 고종이 쓴 ‘대한 장조 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다.

 

 

 

 

 

 

 

 

왕의 능침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어 멀리서나마 조망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것은 제일 위에 있는 표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중앙에 있는 장명등과 혼유석이 보이며 좌우에는 마석과 문인석, 무인석이 서있다.

문인석 옆에는 망주석이 보이며 능침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곡장이다.

 

곡장은 묘의 뒤와 양옆을 친 담장으로 동서북면이 막혀있고 남면이 열려 있다. 곡장은 풍수적으로 살기를 띤 바람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융릉의 능침을 둘러싼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조각은 조선시대 최고의 연꽃조각으로 평가된다는 데 아쉽게도 가까이서 볼 수 없었다.

 

 

 

 

 

융릉 능침과 소나무숲

 

 

 

 

 

 

위쪽의 소전대는 정자각 왼쪽 위에 위치하고,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축문을 태우거나 태운 재를 묻는 곳이다.

융릉 주변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울창한 숲이 방풍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융릉을 들어서면서 왼쪽(서쪽)에 위치한 수라간은 제례음식을 잠시 보관하는 곳이다.

 

 

 

 

 

 

 

 

융릉에서 건릉가는 길과 융건릉 소나무숲

 

 

 

현륭원의 공역이 완공되어 안원전을 거행하다
 
[현륭원(顯隆園)의 공역이 완공되었다. 안원전(安園奠)을 거행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나는 원(園)을 옮기는 한 가지 일에 대하여 오랫동안 경영하고 조처한 것이 있는데, 반드시 비용을 덜 들이고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1)신연과 2)여교 및 3)촉롱은 4)정련을 쓰고, 5)배호(陪扈)하는 군대와 의장은 법가군(法駕軍)을 썼으며, 계원(啓園)할 때에는 자문감(紫門監)의 군사를 쓰고 여사(轝士)와 상여를 끌어당기는 시민, 잔디를 떠내는 사람 및 각종 운반을 맡은 군정들도 다 내탕고에 비치해 둔 돈을 꺼내어 그 양식과 비용을 후하게 주었으며, 의복까지도 자체로 마련하는 것을 금하고 역시 내탕고와 호조의 비용으로 만들어 주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8권, 13년(1789 기유 / 청 건륭(乾隆) 54년) 10월 16일(무진) 1번째기사-

 

1)임금의 장례 때 신백을 모시고 가는 손수레를 이르던 말
2)수레
3)종이나 무명을 발라서 직사각형으로 만든, 촛불을 켜 드는 채롱
4)임금이 거둥할 때 타는 가마를 이르던 말
5)임금이나 귀한 사람을 모시고 따라감

 

 

 

오랜숙원이었던 현륭원의 공역이 완공되는 날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상여를 끌어당기는 시민, 잔디를 떠내는 사람, 각종 운반을 맡은 군정들에게도 다 내탕고에 비치해 둔 돈을 꺼내어 양식과 비용을 지불했고,

의복까지도 자체의 비용으로 마련하는 것을 금하고 내탕고와 호조의 비용으로 지불했다는 것을 보아, 아버지를 향한 효심이 백성에게

그대로 전해졌다고 할 만 하다.

 

 

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 성군으로 칭하는 정조의 꿈과 이상은 이렇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