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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눈 내린 성곽길을 걷다 - 첫 번째 이야기

화성은 여러 번 찾았는데, 이렇게 눈 내린 아침에 찾은 것은 처음입니다.

간밤에 내린 눈은 세상의 빛깔을 흑백 두 가지로 나눠놓았습니다.

습기를 제법 머금었기에 눈은 성벽에서 흘러내리지 않고 그대로 옹기종기 머물러 있습니다.

 

 

 

 

 

 

 

 

 

 

부모님을 향한 효심의 근본이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투영된 곳이 화성입니다. 

 

수원화성은 조선 왕조 제22대 임금인 정조의 효성으로 태어났습니다. 비운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경기도

양주땅에서 경기도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산아래 자리잡고 있던 본래의 수원을 좀 더 북쪽에 있는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습니다. 화성의 건설은 정조 18년(1794) 1월에 시작하여 34개월만인 정조 20년(1796) 9월에 끝나게 됩니다.

 

 

"역사는 불과 200년밖에 안됐지만 성곽의 건축물들이 동일한 것 없이 제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화성은 유네스코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축조이후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또는 손실되었는데, 1975년~1979년까지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과정을 거쳤습니다. 유네스코 심사위원들도 처음에는 현대적 복원에 의문을 가졌는데, 화성의 건축을 고스란히 기록한 책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건축물의 원형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성의 축조를 상세히 기록한 책 '화성성역의궤'역시 세계기록유산에 2007년 등재되었습니다.

 

 

 

 

 

 

 

 

 

오늘 걷게 되는 성곽길은 동쪽의 창룡문에서 시작하여 북동쪽의 화홍문, 북쪽의 장안문, 서쪽의 화서문, 남쪽의 팔달문, 그리고

다시 동쪽의 창룡문으로 한 바퀴 돌아오는 길입니다.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라고 하니, 약 5km 이상을 걸어야 합니다.

안내도에서도 보이듯이 화성은 동쪽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습니다.

 

 

 

   

 

 

 

 

 

 

창룡문은 성의 중심 행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성문입니다.  

 

화성의 중심인 장안문과 팔달문과 비교하여 문의 크기도 작고 형태도 단촐합니다.

창룡문의 경우에는 주변 지형이 고르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에 1)적대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도록 동북공심돈을 세웠습니다. 또 동문 바로 옆에는 쇠뇌를 쏠 수 있는 동북노대를 두어 멀리

팔달산 정상의 서노대와 마주 대하도록 했습니다. 창룡문의 특징은 2)옹성의 출입문이 장안문이나 팔달문과 달리 한쪽 구석에 나 있는 것입니다.

 

 

1)적대: 성문 좌우에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형의 대

2)옹성: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

 

 

 

 

 

 

 

 

 

 

 

성안에서 창룡문 원성으로 가는 길은 얇은 박석을 깔아 놓았습니다.

짧은 햇살에도 박석위에 쌓인 눈이 살짝 녹았습니다.

오래된 건축물이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출입문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화성건축정신의 근본인 [공사실명제]는 창룡문 원성 성벽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를 완벽하게 기록한 책이 "화성성역의궤"입니다.

 

왕조시대에 보잘 것 없는 석공의 이름까지 성문에 새긴 것은 자기가 맡은 일에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하라는 뜻과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동시에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감독관의 이름을 같이 새겨넣어 공사관리의 엄격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뜻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부끄러운 지도자는 기록을 남기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화성의 건설과정 모두를 "화성성역의궤"를 통하여, 그리고 공사실명제를 통하여 기록으로 남긴 정조는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마음이 자신감으로 남아 있었기에 기록을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창룡문 외성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는 동북노대가 있습니다.

동북노대는 1번국도를 타고 오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만날 수 있는 화성 건축물입니다.

노대는 원거리에 활을 쏘기 위해 성 안에 성보다 높이 만든 대를 말합니다.

동북노대는 겨울 설경도 좋지만, 여름에 성벽 끝에 걸리는 일몰이 소나무와 함께 아름다운 곳입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늘어진 솔잎과 딱 자기모양만큼 녹아내린 박석에서 다가오는 계절을  기대해 봅니다.

눈의 색깔은 모든 것의 경계를 뚜렷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성의 외곽길을 걷고자 했으나, 눈 내린 동북공심돈에 끌려 동북공심돈과 동북적대만 보고

창룡문을 통하여 성의 외곽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동북공심돈은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의 북쪽, 동북노대의 서북쪽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시설물입니다.

공심돈이란 두꺼운 벽으로 원형 또는 방형으로 쌓아올린 속이 빈 약간 높직한 누대를 말합니다.

서울 남대문에도 없는 독특한 시설로 정조는 수원화성에 많은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성에는 서북공심돈,남공심돈,동북공심돈 세 개의 공심돈이 있습니다.

이중 동북공심돈은 1796년(정조 20) 7월 19일에 완공되었습니다. 건축적으로 화성에서 유일하게 원형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공심돈 중에서는 성벽 안쪽으로 성벽과 따로 떨어져서 세워졌다는 점이 다른 공심돈과 다른 점입니다.  

또한, 공심돈 내부는 나선형의 벽돌계단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소라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동북노대는 동북공심돈과 창룡문 사이 중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해 높이 지은 시설물입니다.

여장에서 성밖의 겨울풍경을 보는 것도 일품입니다.

 

 

 

 

 

 

 

 

 

 

 

 

 

지척에 있는 동북공심돈을 동북노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화성을 지키던 군사들도 서로 경계하는 위치는 달랐지만,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가까운 거리입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동북노대에 경계서는 병사들은 누각이 없어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다 맞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겨울이면 동북공심돈을 지키는 병사들을 부러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동북공심돈에서 내려다 보면 동장대가 눈앞에 있습니다.

동장대는 군사들의 훈련을 지휘한다는 뜻으로 연무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실지로 동장대 옆에는 국궁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장이 있습니다.

화성을 관람하는 화성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며, 동장대 서쪽으로는 동암문이 있습니다.

 

 

 

 

 

 

 

 

 

드디어 성밖으로 나와 성곽길을 걷습니다.

눈이 제법 쌓여있는지라 성 바깥길에는 인적이 없습니다.

성 안에서 느끼지 못했던 성벽의 위용을 성밖에서 온전히 느낍니다.

 

멀리 눈덮인 동북공심돈의 누각이 보입니다.

이 곳에서는 동쪽으로 동북공심돈에서 서쪽으로 동북포루의 성곽길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갓 뽑아낸 솜뭉치처럼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었습니다.

 

 

 

 

 

 

 

 

 

 

 

 

 

 

성벽가까에 다가서면 더 커보이고 더 가까이 보입니다.

머리끝이 하얗게 쉰 돌들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멀리 동북포루가 살짝 보입니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이 팔달산입니다.

 

밑에 자연석을 다듬어 쌓아놓은 곳이 성벽, 위에 돌을 일정한 형태로 다듬어 쌓아올린 곳을 여장이라고 합니다.

반듯하게 쌓은 여장에는 눈이 없지만, 울퉁불퉁하게 쌓은 성벽에는 눈이 쌓여 있습니다.

성벽에 쌓인 눈을 보면, 자유분방함 속에 겨울의 미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동북포루로 가는 성곽길을 걸으면서 바라 본 시내풍경입니다.

아파트 단지가 많은 요즘, 지붕에 쌓인 눈을 좀처럼 보기 힘든 데 화성 성곽길에는 볼 수 가 있었습니다.

왼쪽으로 멀리 장안문 지붕이 보입니다.

 

 

 

 

 

 

 

 

 

 

 

 

 

 

 

동장대와 동북포루 사이에 있는 동암문에 왔습니다.

암문은 성에서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 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성문입니다.

즉, 몰래 드나드는 출입문입니다.  성 옆에서는 문이 보이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랍니다.

위치는 동쪽에 자리잡고 있지만, 방향은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동암문에서 바라 본 동북포루입니다.

동암문에서 제법 야트막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여 먼 곳까지 적을 살필 수 있습니다.

 

 

 

 

 

 

 

 

 

 

 

 

 

 

 

포루(砲樓)는 성을 방비하기 위해 성벽을 돌출시킨 치 위에 대포를 쏠 수 있게 장치한 누각을 말합니다.

동북포루는 동장대와 동북각루 사이에 위치합니다.

성위에 누각을 지은 것은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군사시설인만큼 총안과 사안을 여러 개 설치하여 무장을 강화하였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동북각루(방화수류정)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암문이 하나 더 있는데, 북암문입니다.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이 북암문에는 모두 구운 벽돌로 바뀌었습니다.

동북포루의 지세가 높아 이 곳은 천천히 걸어 내려와야 했습니다.

역시 북암문도 옆에서는 그 출입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이 녹은 흔적을 쫓아 저기에 출입문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는 보물 1709호로 지정된 조선 정자건축의 백미입니다.

화성의 기본적 기능인 군사적인 목적과 더불어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룬 멋진 건물입니다.

 

이서구 가 쓴 상량문 일부를 살펴보면 [길다란 기둥이 물가에 걸쳤으니, 채색 무지개가 이어져 꿈틀거리고, 높은 난간은 별을

쓰다듬을 듯하니 흰 비단 띠에 얽히어 구불구불하구나. 붉은 노을이 봄 나무를 덮어 비추니, 만 사람의 집을 둘러싸고,

푸른 물결이 실 같은 연기에 둘러싸이니 그 가지가 10리의 길에 떨치는구나. 층층이 쌓인 기둥과 겹겹이 감싼 난간은,

이름난 도읍의 번화함을 더욱 무성하게 하고, 옅은 구름 가벼운 바람은, 아름다운 절기를 마음껏 즐기는 구나]

 

 

상량문만 보아도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詩)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9월 4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7일에 상량하고 10월 19일에 완성되었습니다.

방화수류정 편액글씨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서예가 조윤형이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후대에 다시 쓰여진 것입니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에 올라 용연을 내려다 봅니다.

용연은 용지(龍池)라고도 하는데, 용이 살고 있는 듯 검고 깊은 연못입니다. 연못 가운데 둥근 섬에는 수양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 할 길이없습니다. 멀리 광교산에서 여러 갈래로 흘러내려 오던 수원천이 요연에 잠시 머무르다가 화홍문을 통하여 다시

흘러가게 됩니다.

 

눈이 내린 탓에 못 가운데 둥근 섬의 경계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방화수류정 아래로 내려서면 북수문(화홍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문은 말 그대로 물이 지나가는 문입니다. 화성을 지을 당시 성안에는 광교천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습니다.

광교천은 여름장마때마다 물난리를 겪는 어려움이 있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물을 내기 위해 성을 쌓을 때 7개의

홍예석교를 건조하였습니다.

 

화홍문(북수문)은 그 위치가 용연과 방화수류정 옆에 있어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석교 아래로 떨어지는 물보라의 소리가 아름다워

수원8경의 하나인 '화홍관창(華虹觀漲)' 이라고 불립니다.  화홍관창은 화홍문의 비단결 폭포수를 의미합니다.

 

 

 

 

 

 

 

 

 

 

 

방화수류정과 북수문(화홍문)입니다.

 

두 개의 누각이 지척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사진 왼쪽에 보면 작은 수문이 있는 이를 '석각이두'라고 합니다.  용연의 물이 넘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무기의 머리모양을 한

배수구를 말합니다. 용연에서 석각이두를 통해 흘러나온 물은 다시 수원천과 만나 아래 화홍문을 흐르게 됩니다.

 

화홍문의 석교는 실제로 내려가서 가까이 가보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홍문에서 북동포루를 지나 장안문을 향해 걷습니다.

장안문을 향해 걷는 길은 완연한 평지를 걷는 길입니다. 수원시내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포루(砲樓)는 돌출시킨 성벽의 내부에서 적을 공격하도록 한 군사 시설물입니다.

화성의 포루는 대포로 공격하기 좋은 곳을 골라 북동포루, 북서포루, 서포루, 남포루, 동포루 모두 다섯 군데에 설치하였습니다.

 

 

 

 

 

 

 

 

 

 

 

드디어 성의 큰 문 장안문(북문)에 도착했습니다.

장안문은 서울로 가는 북쪽의 문입니다. 한양에서 출발한 임금을 맞이하는 정문이기도 합니다.

성문의 크기는 앞서 지나왔던 창룡문의 규모를 훨씬 능가합니다. 

 

 

 

 

 

 

 

 

 

 

 

 

 

 

 

 

 

 

장안문 역시 창룡문처럼 성외부에는 옹성을 반원형으로 둘렀습니다.

옹성은 모두 벽돌로 축조되었습니다.  장안문의 특징은 좌우에 적대가 하나씩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북동적대와 북서적대입니다.

장안문이 창룡문과 다른 점은 외부 옹성의 출입문이 창룡문처럼 좌우 어느 한 편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 나 있다는 것입니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 중앙에 출입문을 두는 것은 사방으로 열리고 뚫린다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도성으로 향하는 큰 출입문은 방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교통과 소통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기에 이런 설계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장안문 옆에는 북서적대가 있습니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입니다.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습니다.

 

성 밖에서 북서적대를 마주보면 성 위에서 성 바깥 바로 밑까지 길게 내리 뚫은 구멍이 보이는데, 이 것을 '현안'이라고 합니다.

북서적대와 북동적대에는 각각 세 개씩 뚫려 있습니다. 현안는 성에 접근하는 적을 격퇴시키는 시설입니다.

성의 석축을 정교하게 깎아 일정하게 배치한 모습이 밑에서 보기에는 군사시설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북서적대를 지나 북서포루를 지나갑니다.

해는 머리위에서 걷는 방향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동쪽이 하늘과 서쪽의 하늘은 구름 하나로 명암이 교차합니다.

북서포루를 지나는 길은 화성에서 가장 너른 공원을 갖고 있는 곳입니다.

봄에 파릇파릇 잔디가 올라오면 많은 사람들이 하루 쉬어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여장 옥개석 위에 잔설이 녹아 고드름이 되었습니다.

부드러움이 딱딱함으로 변했다가 다시 부드러움으로 돌아갑니다.

 

 

 

 

 

 

 

 

 

 

 

 

 

 

 

장안문에서 서쪽으로 쉬지않고 걸어서 화서문에 도착합니다.

왼쪽에 서 있는 건물이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오른쪽이 화서문(보물 제403호)입니다.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바로 옆 북치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앞서 만났던 동북공심돈이 원형의 형태인데 반해 서북공심돈은 사각형의 모양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성벽과 같이 세워졌다는 점이 동북공심돈과 다릅니다. 성벽과 같이 세워졌기에 동북공심돈보다 그 크기가 훨씬 커 보입니다.

 

건축구조는 성벽의 일부를 약간 밖으로 돌출시켜 치(성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성벽)를 만들고, 그 위에 벽돌을 가지고 3층의 망루를

세우고 망루 꼭대기에 포사를 지어 군사들이 머무를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화서문은 성의 서문입니다.

모양은 앞서 성곽길의 출발지였던 창룡문과 흡사합니다. 외부 옹성 출입문은 창룡문과 같이 한 쪽 구석으로 나 있습니다.

화서문도 창룡문과 같이 성 좌우에 적대를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는 서북공심돈을 두었습니다.

화성의 주 출입문은 북문(장안문)과 남문(팔달문)이었기에, 화서문을 통한 통행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물 제403호 화서문에는 재미난 일화가 있습니다.

 

문화재청 기록을 가져와 보면

"화성을 축성할 때 비용이 89만냥 정도 들었다고 한다. 나라의 재정을 휘청거리게 할 만한 큰 액수였기 때문인지 재정마련에 대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정에서 직접 화서문 밖에 주막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화서문 밖 주막은 기존의 주막들에 비해

공사장과 가깝고 주모가 예뻤기 때문에 품삯을 받고 한 잔 하러 온 인부들로 늘 북적였다고 한다.

당시 공사에 참여한 인원이 대략 1만 2천 여 명 정도 인데 공사 현장 주변에 주막이 하나 밖에 없었으니 장사가 워낙에 잘되었다.

그런 탓에 화서문 밖 주막은 관(官)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화성을 짓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나라에서 직접 주막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정조는 화성축성에 강제로 백성을 동원하는 일이 없었고, 노역에 동원된 인부들에게는 꼬박꼬박 임금을 챙겨주었고,

직접 '척서단'이라는 약까지 지어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정조의 어진마음 때문이었는지 전국에서 화성공사에 참여하려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통치자가 성군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힘든 노역이지만,

더욱 신명나게 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