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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하고 있는 건릉은 조선왕조 제22대왕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능이다.

이 능은 합장릉인데, 합장릉이란 봉분 하나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왕릉을 말한다.

융릉에서 솔숲 오솔길을 따라 10여분 걸으면,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영릉과 묘하게 닮은 건릉을 만나게 된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쌓여 있는 건릉은 답사객들의 휴식처로도 안성맞춤이다.

건릉의 홍살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금천교가 나타난다.

 

 

 

 

 

 

 

 

 

 

 

건릉의 금천교는 옆에 있는 융릉의 금천교와는 그 모양이 구별된다.

융릉의 금천교는 조선왕릉에서는 보기 드물게 다리형태의 모양을 그대로 갖췄지만, 건릉의 금천교는 그냥 바닥에 판석을 깐 형태이다.

난간이 있는 다리의 형태를 갖추지 않아, 자칫 다리를 건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물이 흐르고 있던 흐르지 않던 금천교를 건넌다는 것은 부정한 것을 씻어내고 신성한 장소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금천교를 건너면 어김없이 우뚝솟은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능 전체의 풍경이 그려진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한 정조의 첫 왕릉은 현 위치가 아니었다.

국장을 주도했던 정순왕후와 벽파는 11월 6일 현륭원(융릉) 경내 옛 수원부 1)강무당터가 길지라면서 그곳에 정조를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 후 순조 21년(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69세로 창경궁 자경전에서 승하하자 9월 13일 효의왕후 장례를 치르면서

강무당 자리에 있던 건릉을 옛 수원부 구 향교터로 천장해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했다.

 

1)강무당터: 강무당이란 군사들이 훈련하던 병영터로서 풍수에서 흉지로 친다.

 

 

 

 

 

 

 

 

 

 

 

 

위에 건릉과 아래 융릉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약간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조선왕릉은 신성한 공간인 능침이 참배자나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능침과 정자각, 홍살문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다.

즉 가운데 위치한 건물인 정자각이 능침의 가리개가 된다. 그러나 아래의 융릉은 정자각이 능침의 앞을 막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 있다.

뒤주에 갇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답답함을 능의 공간배치를 트이게 해서 풀어주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박석이 깔린 참도(홍살문에서 제례를 지내는 정자각까지의 길)는 융릉과 그 형태가 비슷하며,  넓은 박석을 두 줄로 깔아 놓은 곳이 신로이고,

그 오른쪽에 낮은 곳에 위치한 길이 신로이다. 또한 융릉과 마찬가지로 참도 주변에 박석을 넓게 추가로 깔아 놓아서, 전체적으로 능의 전경을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판위는 참도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는 가로․세로 2 미터 정도의 면적에 전돌이 깔린 곳이다.

이곳은 왕이 제례시에 홍살문 앞에 내려서 절을 하고 들어가는 곳으로 배위(拜位) 또는 판위라고 한다.

 

 

 

 

 

 

 

 

 

 

 

정면 참도에서 오른쪽 비각쪽으로 비켜서서 바라보면 정자각 뒤로 능침이 보인다.

 

 

 

 

 

 

 

 

 

 

 

 

 

 

국장도감에서 올린 건릉 상량문

 

“삼가 생각건대, 1)제향(帝鄕)으로 진유(眞遊)가 아득히 멀어지니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어도 올라갈 계단이 없으며,

2)주구(珠丘)에 서기(瑞氣)가 성하니 하루도 못되어 정자각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지개 형태의 대들보가 길이 공고하게 받히고 있으니 3)봉력(鳳曆)이 더욱더 창성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 전하(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殿下)께서는

단군(檀君)·기자(箕子) 이래 요(堯)·순(舜)처럼 계승해 탄생하였습니다. 영조[英考]께서 효성스럽다고 하시니

매양 할아버지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버지를 의지한다는 4)옥음(玉音)을 받드셨으며,

천하는 인덕(仁德)에 귀의하는 법이니 직책에 있는 신하들의 도움을 기다릴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민사(民事)에 부지런하며 제사를 경건하게 지내고 군사를 잘 다스리는 등

허다한 성절(盛節)과 같은 것은 5)태사씨(太史氏)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며,

6)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호위하며 검약을 숭상하고 풍속을 바로잡은 제반 홍규(弘規)는

7)삼대(三代)이상의 정치처럼 환히 빛났습니다.    -이하 생략-

 

-조선왕조실록 순조 1권, 즉위년(1800 경신 / 청 가경(嘉慶) 5년) 9월 2일(신사) 2번째기사-

 

1)제향: 하늘

2)주구: 임금의 무덤

3)봉력: 달력을 의미하는 데 여기서는 오랜세월

4)옥음:임금의 음성

5)태사씨: 사관

6)이단: 경서가 아닌 잡서.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攻乎異端(공호이단)이면 斯害也已(사해야이)에서 나옴.

7)삼대: 하(夏)·은(殷)·주(周)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800년(정조 24)7월 아버지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1804년까지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영조때에 할아버지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했던 벽파들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정조의 죽음은 곧 집권세력이었던 시파의 숙청으로 이어진다.

풍수지리상 흉지로 알려진 강무당터에서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기까지 21년이란 세월이 흐르게 된 것은

조선왕조 몰락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위 건릉 상량문은 개혁의 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어서 벽파의 시련을 또 받게되는 정조의 슬픔과는 대조적으로 ,

정조의 인품을 기리는 그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왕릉의 중심적 건물이 정자각은 제례를 모시는 곳이다.

정자각은 그 평면이 한자의 정(丁)자 형태와 같다고 하여 이름붙여 졌으며, 크게 정전과 배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전은 제례를 지내기 위한 닫힌 공간이며, 배전은 제례를 준비하기 위한 열린공간이다.

 

건릉 정전은 사면이 벽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배전은 벽이 옆이 기둥으로만 정면 1칸 측면2칸으로 구성되어있다.

정자각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지붕에는 용두와 잡상이 놓여있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정자각의 월대는 화강암으로 만든 기단위에 바닥에 전돌을 깔아 마감하였다.

월대 위에 정전을 앞에 있는 배전보다 한 단 위에 설치함으로써 정전의 위계가 배전보다 더 높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정자각에 오를 때에는 홍살문에서 참도를 통해 걸어들어와 오른쪽에 계단인 동계를 통하여 올라가고, 왼쪽의 계단인 서계를 통하여 내려간다.

동계는 두 개가 있는데 왼쪽은 신이 오른 신계, 오른쪽은 왕이나 제관들이 오르는 어계이다.

왼쪽계단 서계의 계단이 하나인 것은 신은 정자각에서 다시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이 바로 정전 뒷문을 통하여 능침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신계의 소맷돌에는 융릉과 마찬가지로 양 옆에 구름문양과 태극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소맷돌 맨아래 고석에 새겨진 태극문양은 보통 3태극이지만, 건릉에 있는 고석에는 4태극이 새겨져 있다.

 

 

 

 

 

 

 

 

 

 

건릉 정자각을 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건릉 정자각의 구조형태

 

 

 

 

 

 

 

 

 

 

 

건릉 정자각 동쪽(오른쪽)에는 왕과 왕비의 일대기가 적힌 비(碑)를 안치한 비각(碑 閣)이 있다.

비각 안에는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 왕후의 일대기가 비석에 쓰여 있다.

 

 

 

 

 

 

 

 

 

 

 

건릉의 비석은 능을 옮기기 전에 비석은 남아있지 않고, 1900년(광무3년) 황제로 추존한 이후의 비석만 남아있다.

비의 전면에는 고종이 어필로 쓴 '대한제국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라고 적혀있다.

 

 

 

 

 

 

 

 

 

 


정자각 서쪽에 위치한 수라간은 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보관하던 곳이다.

융릉과 함께 10여년 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예감은 정자각 왼쪽 위에 위치하고,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축문을 태우거나 태운 재를 묻는 곳이다.

두께 14cm 정도의 긴 석축을 ㅁ자 형태로 만들었다.

 

 

 

 

 

 

 

 

 

 

 

 

아쉽게도 건릉도 융릉과 함께 능침으로의 출입을 엄격히 막고 있었다.

능침에 대한 출입은 문화재청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허락을 얻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멀리서나마 묘 앞에 혼유석이 한 개보이는데, 합장릉의 혼유석은 보통 두 개를 설치하는 데, 융릉과 건릉에는 혼유석이 한 개만 놓여있다.

혼유석 앞에는 장명등(묘 앞면 중앙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설치한 석물)이 보이며,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망주석이 보인다.

무인석 옆에는 마석을 세워 놓았다.

 

 

 

 

 

 

 

 

 

묘를 둘러싸고 있는 곡장(담장)과 망주석,문인석,무인석,마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묘 주위의 호석이나, 양석 그리고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난간석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정조의 능상에는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있으며, 아버지 사도세자는 병풍석만 있고 난간석만 있어 부자가 서로 보완해(?)주고 있다고 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그 개혁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 사도세자 옆에 묻히고 말았지만,

그가 남긴 치적은 조선의 마지막 문화의 황금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확인할 수 있는 끝없는 애민사상과 효심 그리고 계몽과 개혁, 사회통합등 왕조시대의 49세의 나이는

그 개혁을 완성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군주는 기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정조가 남긴 기록과 사상은,

아직도 민족의 영혼에 큰 온기를 넣어주고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