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초가뜰 정자살문


해마다 가을이면 월동준비로 문에다 창호지를 발랐다. 

풀비로 문살에 골고루 풀칠을 한 다음 창호지를 붙이고, 마지막에 국화꽃 몇 송이 손잡이에 붙이면, 사랑 표현에 투박했던 아버지의 

일년 내 단 하루 

사랑고백이 끝난다. 








신흥사 띠살문 


완자살창, 띠살창, 빗살창, 정자살창..........우리 전통 방문을 부르는 이름은 그 수도 수 십 가지이다.

여기서는 그 문의 원형에 대해 논하기 보다는 발걸음 닿는 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우리 문의 여러가지 모양을 눈으로 즐기기로 한다. 









선암사 대웅전 솟을빗살창 


솟을살문이란 살이 도드라진 형태를 보고 붙인 이름으로 일명 격자빗살문이라고도 한다.

살이 도드라진 위에 대부분 꽃을 새겨넣어 화려한 꽃살문양의 기본이 된다. 










내소사 꽃살문


내소사는 백제 무왕때 혜구두타가 창건한 절이다. 

조선 인조때 건립된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은 조선중기 사찰건축의 백미이다. 

어칸의 네 문짝에 조각된 꽃살은 우리나라 사찰 꽃살문의 대표적인 꽃살 중 하나로 대칭적 균제미와 조형미가 뛰어나다. 









내소사 꽃살문











내소사 꽃살문


꽃살문은 파초,연꽃,모란,국화,보상화문,당초문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연화문은 연꽃을 상징하는데, 연꽃은 불교에서 초탈,보리,정화 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내소사 솟을꽃살문


조각된 꽃살은 오방색(청·백·적·흑·황)으로 칠해진다.













내소사 솟을연꽃살문










도갑사 꽃살문


절집마다 다양한 꽃살문을 만날 수 있다. 









수덕사 꽃살문











낙산사 통판투조꽃살문


대부분의 문창살은 날살과 씨살을 바탕으로 제작되나 통판투조꽃살문은 널찍한 나무판을 놓고 밑그림을 그린 후 통째로 문양을 새겨 문틀에 끼워넣는 방식을 취한다.

조선시대 민화를 많이 닮아있어 조선시대 불교문화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실상사 꽃살문













내소사 솟을연꽃살문


소박한 절집에서 만나는 꽃살문은 작아서 보이지 않던 마음의 창을 열어주는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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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evasses 2015. 6. 8. 19:52
  • 지성의 전당 2018.11.05 20:40 신고 ADDR EDIT/DEL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초탈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